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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상

갈비탕 먹으러 가는 길

by 조각모음_KIDY 2020. 6. 3.

   한창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무렵, 대학 때 섬긴 교회의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일 년 반 만에 전화가 온 적 있다. 정말 오랜만에 전화하셔서는 대뜸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하시며 기도하다가 우리 딸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한다고 하셨다. 전화를 받았을 때 정말 건강해서 웬 건강 걱정을 이렇게 하시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다음 날부터 일주일 정도 지독하게 위염과 장염을 앓았다. 내가 아플 걸 어떻게 아시고 전화를 하셨을까 싶어서 신기했고, 내가 떠난 지 한참 뒤에도 여전히 나를 떠올린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런 작은 사건이 생긴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내게 전화를 주셨던 목사님은 내가 만나본 목사님들 중 가장 특별한 분이다. 목사님은 내가 섬겼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고, 나는 교회 청소년부 총무 교사를 맡았던 신학생이었다. 담임목사와 학부 신학생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깊은 유대감이나 친밀감이 생기기 어려운 관계가 분명했다. 목사님은 신학하는 딸과 아들이 있으면서도 언제나 나를 ‘딸’이라 부르셨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소개하셨다. 늘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으며 일을 시키는 부하 교역자가 아닌, 선배로서 자신이 걸어온 목회 여정을 소개해주는 분이셨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목사님을 은사로 여겼다.

 


   얼마 전 스승의 날을 맞아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어, 우리 딸 왔어?” 늘 나를 ‘딸’이라고 부르니 목사님의 부인도 어느 순간부터 나를 ‘딸’이라고 부르셨다. “우리 딸이 웬일로 왔어?” 1년이 넘도록 찾아뵙지 못했는데, 어제 본 것처럼 반갑게 맞아주셨다. 언제나 그랬듯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시고, 몸은 아프지 않은지, 사역은 잘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다. 사실 그동안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차마 힘들었다는 말은 내뱉지 못하고 대신 목사님 같은 목회자를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목사님은 내 마음을 다 읽으셨다는 듯 별말씀이 없으셨다.

   찾아뵐 때마다 목사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안수기도를 꼭 해주신다. 목사후보생으로 공인받던 날부터 매순간, 내 온 마음을 담아 목회의 여정을 축복하고, 또 축복해주신다. 이날도 그랬는데, 예전과는 달리 내 머리에 올린 목사님의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은퇴를 앞두고 계신 목사님의 이마와 눈가의 깊은 주름이 떠올랐다. 메마른 사역 현장에서 지치고 힘들 때 목사님께 전화를 하거나 찾아뵙곤 했는데, 이게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문득 두려웠다. 만났던 목사님들 중 내 건강과 앞길을 걱정해주시는 목사님은 이분 밖에 없는데, 내게는 나를 사랑하는 은사님이 필요한데 떠나시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안수기도를 해주시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교회 앞에서 갈비탕을 사주셨다. 나는 갈비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갈비탕을 대단히 잘하는 곳도 아닌데 말이다. 목사님은 항상 이곳에서 내게 밥을 사주신다. 당신의 아드님이 목회하면서도 늘 나에게 앞으로 여자 목회자의 시대가 올 거라고, 우리 딸은 머리가 좋으니까 목회 잘 할 수 있다고 격려의 말을 잊지 않고 해주신다. 목사님은 그렇게 진보적인 분도 아니시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잘 모르시지만, 이런 말들을 내게 해주신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 목사님을 만날 때면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목사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절절히 느껴져서 목이 메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내가 그분의 딸이 되었을까?’ 목사님께서 나를 ‘딸’이라고 부른 지 오래되었지만, 친부모님이 아닌 누군가가 나에게 ‘딸’이라고 부르는 게 여전히 어색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선교동역자로 나가게 되어 갈 교회가 없던 나를 교회로 불러들이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마음 안 가지고 목사 하겠다고 계속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기특해서 그랬을까? 부교역자로 있던 모든 사역자가 목사님의 딸과 아들은 아니었으니 나를 딸이라고 부르신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를 왜 딸이라고 부르실까?’라는 질문을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그동안 목사님께서 내게 사랑을 베풀었던 모든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목사님이 여자 목회자는 사역지 구하는게 힘드니까 나가지 말라고, 조금만 더 나랑 목회하자고 할 때 말을 들을 걸. 기어코 다른 교회에서 사역을 하겠다는 내게 말씀하셨다. “다른 교회로 보내주는 거 아니야. 다른 교회에 선교사로 보내는 거야. 가서 열심히 사역해야해.” 떠나고 나서야 목사님께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보면 이상하게 인격적인 만남에 대한 갈증을 느낄 때가 많아진다. 교회 안에서 인격적이고, 사랑이 가득한 관계가 형성되고, 거기서 힘을 얻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는 게 아쉽다. 그래서 이런 특별한 만남이 더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느낀다. 사역에 메여있으면 힘이 빠지는데, 이런 만남을 통해 다시 사역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이제는 사역을 하다가 마음이 메마를 때마다 목사님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갈비탕 먹을 생각을 한다. 

 

 


이전도사 / 20대, 교회에서 사역하는 여성 전도사입니다. 신학하는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내는 모든 순간 역시 신학하는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글에 담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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