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있었던 일을 말해보고자 한다. 한 친구가 매우 아팠다. 심장이 약해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약을 먹었고 쓰러지기도 자주 쓰러졌다. 어느 날은 심정지가 왔다. 약 30초 정도 심장이 멈췄었고 다행히도 친구는 병원에서 다시 일어났다. 나는 놀라서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향했고 친구는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그 웃음에 안도감이 들었는지 너무 놀랐던 가슴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참 많이 울었다. 진정되고 나서 조금 뒤에 친구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찾아왔다. 병원에서 목사를 만나는 일은 흔한 일이다. 교회의 성도가 아프면 찾아와서 위로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고 가니까.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 자리를 바로 떠나려고 하는데 목사가 친구에게 건넨 첫 말을 들었다.
“○○야, 심장이 멈췄을 때 뭔가 본 게 없니?”
내 귀를 의심했다. 목사가 병원에 와서 심정지까지 왔던 친구에게 처음으로 하는 말이 “많이 놀랐겠구나,” “괜찮니?”가 아닌, 죽었을 때 사후세계를 본 적이 없냐는 그 속삭임이 무서웠다. 그 목사는 지금을 살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 저 너머의 허상을 확인하려는 듯 다른 공간 속에 왜곡되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학교로 복귀한 친구에게 교회에서도 목사가 자주 그런 질문을 하는지 물었다. 친구는 개인적으로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긴 하지만 자주 천국 소망, 천국에 가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라는 말은 자주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왜 알지도 못하는 사후세계에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것인지 항상 궁금했다. 확인할 수가 없어서 아픈 사람에게 안부보다 사후세계의 발견을 먼저 묻는 무례함까지 선보여 주면서까지 천국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는 삶에 무슨 매력이 있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 시선의 문제이다. 현재의 삶을 채점표 위에 세워놓고,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다리는 사후세계 신앙은 그 목사를 현실에서 떼어놓고 사후세계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현실에서 멀어지자 그 목사의 눈에는 한 사람의 상처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했던 친구가 평생을 안고 살았을 무거운 짐은 목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급작스럽게 쓰러졌다가 일어난 후 울먹거리는 가족들의 얼굴을 향해서 애써 웃음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친구의 마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부활, 영생은 분명 그런 삶을 지향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복음서나 바울 서신이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영생은 현실을 버리고 사후세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원하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말하는 영생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에 더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우리는 가급적 현실을 부여잡아가며 살아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가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세계의 질서를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하게 하는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물론 때로는 이 세계가 잔인하기 때문에 눈을 돌리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잠시라도 눈을 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식으로 간신히 살아간다) 앞서서 목사를 좋지 않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분 또한 나름의 현실의 도피처를 찾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했다면 기억은 해야 한다. 예수가 오천 명이 넘는 민중들의 배고픔을 외면했었는지, 바다에 빠진 제자를 외면했었는지, 십자가 처형 이후 좌절에 빠져있던 제자들을 외면했었는지 말이다. 교회란 건 본래 그 모습들을 함께 나누고 용기를 얻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혹여 오해할까 붙이는 말이지만 나는 사후세계나 기적의 세계가 전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나는 섣부른 고백이나 증언보다는 신비는 신비로 남겨두고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신비는 그저 신비로 남겨두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나는 마음이 편하고, 나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한 답변이다.
살아가면서 내가 사후세계에 대해 줄줄 설명할 수 있는 날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마 내가 살아가면서 하는 것들은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사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앙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은 비록 청동 거울에 비친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지만 언젠가는 신비 속에서 드러나는 신의 얼굴을 온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일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세계에 대한 해석은 누구나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엇갈린 시선을 보내지는 말자. 적어도 잔인한 세계를 함께 바라보고 서로의 얼굴을 붉히며 갈등하자.
야매번역가 / 20대.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했으나 교회는 반 년째 쉬는 중. 스팀 게임, 넷플릭스, 추리소설, 드림팝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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