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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상

죽음의 수용소에서 만난 환대

by 조각모음_KIDY 2020. 7. 14.

  어릴 적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을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그래서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책이나 다큐멘터리영화를 찾아보다가 언젠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꼭 가보겠다고 다짐했다항상 생각해두다가 대학교 4학년 때폴란드가 어떤 나라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가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수용소가 있던 아우슈비츠 근처에 크라쿠프라는 도시에 숙소를 잡고오슈비엥침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아우슈비츠는 독일 나치가 독일식으로 바꾼 이름이고원래 그 지역의 폴란드식 이름은 오슈비엥침이라고 한다.) 회사 점퍼를 입은 인도 아저씨 옆에 앉게 되었는데오슈비엥침으로 가는 90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되었다아저씨는 세계 주요 도시에 있는 지사에서 근무를 해서 서울을 비롯해 더블린베이징에서 일했고지금은 프라하에서 일한다고 하셨다지금은 출장을 온 김에 주말을 이용해 근교에 있는 수용소를 방문하는 거라고어색할 법도 한데우리는 길을 가며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선지가 같으니 자연스럽게 수용소도 함께 돌아보게 되었다그날은 유독 흐리고 한치 앞도 안보이게 짙은 안개가 낀 날이었다수용소를 돌아보는 내내 슬픔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더 깊은 감정들이 내 안에서 차올랐다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학대할 수 있는지 충격이었다흐린 날을 좋아하지 않지만맑은 하늘이 펼쳐진 그런 날씨에 방문했다면 여기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이름 모를 죄책감이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전쟁이 끝난 후 생존자들의 분노에 의해 수용소의 일부는 부서져 버렸지만남은 사람들은 후대에도 이 비극을 알리기 위해 수용소를 보존하는 길을 택했다그리고 보존된 수용소는 이렇게 아프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다고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용소를 돌아보는 내내 마음에서 피어난 슬픔이 온 몸에 퍼져 배가 고픈지도 몰랐다오전에 수용소로 향해 오후까지 돌아보고 오는 일정이라 수용소나 그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하지만 수용소 이외에 다른 건물은 찾아볼 수 없었고매점에서 끼니를 떼워야 하는 상황이었다매점에서는 조각 피자 같은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팔았지만가격도 그렇고 메뉴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선뜻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인도 아저씨는 매점 앞에서 음식을 사먹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피자와 음료수를 사서 건네주셨다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고폐를 끼치는 느낌이 들어서 거듭 거절했는데학생이고 내가 사주고 싶다며 끝끝내 음식을 손에 들려주셨다.

 

  아저씨는 그러고는 카르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자신은 힌두교인이고이 모든 것이 카르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자신의 딸이 인도가 아닌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지금 내가 이방인인 널 도와주면 내 딸이 혼자 여행할 때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또 다른 누군가가 내 딸을 도와주지 않겠냐고 했다내가 기억하기로 낯선 땅에서 현지인도 아닌 이방인에게 환대를 받는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다더군다나 한국에서는 힌두교인과 이야기해볼 기회가 없어서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막연한 안 좋은 생각이 있었는데이 못난 편견이 완전히 깨져버렸다예상치 못한 궂은 날씨에 옷도 젖어버리고 추웠다그렇지만 환대를 받은 순간에는 인도 아저씨가 건네 준 온기에 온 몸이 따뜻해진 듯 했다.

 

비르케나우 수용소

  환대의 경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간단한 식사를 마치고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 둘러본 후 가까이 있는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그곳에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참혹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희생자들이 겪었던 모진 고문과 노동의 흔적을 보며 알 수 없는 슬픔에 한참을 빠져있었다다 돌아본 후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다 돌아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돌아가 숙소가 있는 크라쿠프로 가야한다그런데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나머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버스가 끊겨버리고 말았다수용소 이외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곳이라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도 없었다어떻게 해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이번에도 인도 아저씨가 나서주었다아저씨는 택시를 잡고는 같이 타고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가자고 했다후에 택시비의 절반을 드리겠다고 했지만역시 거절하셨다그러고는 후에 내가 공부를 마치고 돈을 벌게 되면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 사용해달라고 부탁했다.

 

  크라쿠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아저씨는 후에 자신에게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여행길이 같아 잠시 같이 걸었던 것이니 크라쿠프로 돌아와서는 각자의 숙소로 향하며 헤어졌다도미토리로 돌아와 아저씨한테 사진을 보내려고 하니 아저씨가 이메일을 알려주지 않았다혹시나 해서 검색창에 회사 이름과 아저씨 이름을 함께 쳤더니 그 회사의 경영진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역시 어린 시절 개발국 사람들에 대한 못난 나의 편견이 깨지는 경험이었다.) 결국 사진은 전해주지 못했고아저씨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났다수용소를 돌아본 날날씨도 춥고하루 종일 걸어서 고됐지만 행복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홀로 떠난 여행이 처음이었고주변에 폴란드를 여행했다는 사람은 없어서 가기 전에도가서도 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다정말로 이상한 사람을 만나 기분이 상한 일도 있었지만환대의 기억이 그 모든 걸 덮어버렸다수용소를 방문한 이후 수많은 나라와 도시로 여행을 다녀왔고다양한 경험을 했다그렇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떠오르는 여행의 추억은 몇 되지 않는다하지만 폴란드에서 받은 환대의 경험은 내 맘 속에서 밝게 빛난다이 기억이 떠오를 때면 그때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곤 한다환대라는 경험이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느꼈다.

 

  인도 아저씨는 나를 만난 날 내게 환대를 베풀며 힌두교의 카르마 개념을 살아냈다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의를 삶으로 살아내는 그 인도 아저씨를 생각이 날 때면 기독교인인 나는 이웃을 온전히 사랑한 예수님을 통해 받은 그 환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베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전도사 / 20대, 교회에서 사역하는 여성 전도사입니다. 신학하는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내는 모든 순간 역시 신학하는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글에 담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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