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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을 읽고

by 조각모음_KIDY 2022. 11. 16.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자 나타난 겉표지 속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목구멍 아래부터 묵직한 것이 올라왔다. 타인의 슬픔에 뜨거워지고 공감하고 아파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값이라 생각했던 낭만적 시절을 겪은 나의 절망이 다시 올라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건은 2012년 밀양의 여름이었다. 7년이 넘도록 길어진 765kv 송전탑 건설 사건으로 끝내 고(故)이치우 어르신이 몸에 불을 붙였다. 이 사건 자체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목숨(?)을 잘 썼네, 어차피 죽을 노인 죽은 것이 대수인가?’ 이들은 고(故)이치우 어르신을 포함해 밀양의 모든 어르신을 말로 죽였다.

  두 번째 사건은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온 국민이 울었다. 하지만 이 애도의 기간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와의 식사 자리에서 ‘언제까지 저럴지, 이젠 지겹다.’라는 발언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구역질이 났고, 당시 나는 지인의 절반을 끊어냈다.

  사람이 죽었다. 보도된 뉴스 속 숫자와 글자로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담백(?)하게 표현되더라도 사람이 죽은 것에 함께 울어주는 것이 먼저가 아닌지 생각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울어주지 않아도 된다. 가벼운 혓바닥 놀릴 바에 침묵이 나았을지도.

 

  저자는 미성숙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모자란 것은 ‘지성’이 아닌 ‘감수성’이라 말한다. 감수성이 없다는 것은 그저 ‘없을 수도 있지’로 끝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감수성이 없다는 것은 곧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가능성이 상식적으로 있다는 것, 잠재적 폭력이다. 위의 두 사건 속 감수성 없는 인간들은 결국 말로 폭력을 행했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대한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더 섬세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이 시작된다…(p94)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픔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슬픈 일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많은 사람, 특히 많은 청년이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정말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몰랐다면 알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웃의 아픔과 눈물에 함께 고통받고 눈물 흘리지 않는 것. 그것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죽이는 것만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내버려 두는 방식 또한 살인이다.

 

처음 한 명의 죽음은 ‘자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부터는 ‘타살’이고,

수백 수천 번째가 되면 그것은 ‘학살’이다.(p235)

 

  책을 읽는 내내 정돈되어 가는 핵심은 우리는 슬픔을 공부해야 하고 그 공부에 또 슬퍼(위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눈물이 메마른 시대와 통각(痛覺)이 마비된 사람들의 폭력을 말하며 타인을 향한 감수성 회복과 위로의 마음, 슬픔을 공부하려 노력하는 것에 대해 강조한다.

 

오늘날 ‘미성숙한’(즉,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p188)

 

  나는 저자의 감수성을 영성으로 읽었다.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것, 즉 감수성과 영성을 갖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고 채워가는 것이다. 나의 신앙과 나의 천국 소망을 위한 영성훈련 또한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웃의 슬픔에 동참하고 진정한 위로를 나눌 수 있는 영성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여기서 사랑은 기쁘고 행복한 상황만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것이다(p202)

 

  누가복음 10장 29절에서 율법교사가 예수께 옳게 보이고자 물은 질문을 곧 나의 질문으로 평생 갖고 있다.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슬픔을 공부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여기서 공부해야 할 이웃의 슬픔은 내 영역 안에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이웃의 슬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감각을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완벽한 동감((同感)을 할 수는 없지만, 온전한 공감(共感)을 위해 민감해져야 한다. 위로는 쉬운 것이 아니다.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실감하는 사람만이 위로할 수 있다.

우리는 글자보다 더 축소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그것은 진화일까 아닐까.(p353)

 

  얼굴이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텍스트로 (역) 진화되어간다. 이것은 코로나 19 사건을 만나 더욱 가속화됐다. 철학가 레비나스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장소’이자 ‘신의 형상이 보이는 창’이 곧 ‘타자의 얼굴’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서 신의 형상을 봐야 하는데, 이 시대가 만만치 않다. 통계적 수치와 문자 속 존재하는 슬픔까지 민감성을 뻗쳐야 한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할 것이다(마5:4)’

 

  슬픔이 지겹다 못해 조롱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을 지녀야 한다. 이는 곧 예수의 심장이다. 그의 심장은 슬픔으로 가득했고, 그는 슬픔을 외면하기보다 그 슬픔에 동참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형제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요11:35), 지도자 없이 방황하는 백성과 예루살렘의 멸망 앞에서도(눅19:41) 슬퍼하셨다.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며칠 전 우리는 또 하나의 슬픔을 달력과 숫자에 새겼다. 2022년 10월 사망자 156명이라는 숫자에 거둬진 고통과 슬픔에 함께 고통받고 슬퍼해야 한다.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진정한 애도와 겸허한 위로를 하기 전, 조롱과 비웃음에 득달같이 몰려든다. 아이러니하고 더 무서운 것은 혀를 차며 위로하는 사람이다. 이 시대의 비극은 눈물이 없다는 것이다. 가짜 눈물이 아닌 온전한 위로와 공감이 담긴 눈물이 없다. 슬픔이 지겹다 못해 조롱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슬픔을 공부하고, 온전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예수의 심장을 지녀야 한다.

 

 

 

 

귀문어 / 대학YMCA에서 뜨거운 20대를 보냈고, 현재 한국YWCA 지역청년네트워크팀에서 일한다. 먹고 마시기에 능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매력의 소유자다. ‘동네 운영사’라는 직종을 스스로 만들어 열심히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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