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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책

나는 그 상처를 덤덤히 보았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읽고

by 조각모음_KIDY 2022. 10. 4.

   중학생 시절 생생히 떠오르는 섬뜩한 기억이 있다. 제법 덩치가 있는 한 남성 교사가 한 여학생에게 갖은 폭언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교과서로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위권의 성적으로 성실히 공부했던 반 친구다. 오랜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자신의 수업 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교실 전체의 분위기는 얼어붙어 있었고, 하나같이 상기된 모습들이었다. 친구가 폭력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교사를 말리지 못했다. 나 역시 그 현장을 덤덤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라본 그 친구는 묵묵히 고개를 떨구어 울면서도 무언가에 대해 저항하려는 듯 보였다. 폭력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자 하는 그 친구에 대해 의아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은 저자인 리베카 솔닛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회고록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그중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자신에게 책상을 선물해준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자신을 떠난 벌이라며 열다섯이나 휘두른 칼에 피를 흘렸다. 과다출혈로 죽을 뻔했지만, 응급 수혈로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솔닛은 그런 상황에서 그 친구의 상처를 바라보며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때 그 상처를 덤덤히 보았다. 감정을 느낄 능력이 억눌러져 있던 탓이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사회의 시선으로도 명백한 데이트 폭력이자 범죄행위이다. 헤어진 이후 연인도 아닌 상황에서 발생한 보복성 범죄는 특수 폭행 및 살인미수에 해당한다. 하지만 솔닛은 당시 여러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과 같은 상황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고백한다. 가해자는 아무 법적 처분을 받지 않았고, 심지어 피해자는 그 일로 비난받았으며, 그 사건이 있었던 장소로부터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바라보며 문득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다. 20대 후반의 여성 역무원이 신당역 여자 화장실을 순찰하던 중, 30대 초반의 남성인 가해자가 휘두른 흉기에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긴박한 상황 중에도 비상벨을 눌러 도움을 요청했고, 다른 직원들이 도착해 가해자를 진압했다. 피해자는 심정지 상태로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를 하여 병원으로 옮겼지만, 2시간 반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알고 보니 둘을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였다고 한다. 이전에도 300여 차례 연락과 불법 촬영 영상으로 협박하여 가해자를 고소했으나, 법원은 ‘회계사 자격증이 있고 주거가 일정하여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3개월간 계속 협박성 메시지를 보냈고, 피습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사는 이유는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16년 2월 벌어진 ‘안양 암매장 살인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남성은 여성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시신을 대형박스에 넣어 경기도 광명시 어느 공터에 암매장했다고 자백했다. 검찰은 피의자가 계획적인 살인을 주장하며 사형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계획적인 살인을 인정하지 않고 징역 18년형을 선고했다. 이렇듯 연인이나 배우자에 의해 사망하는 여성의 수는 1년 평균 100명이나 되고, 매년 발생하는 데이트 폭력 사건만 해도 1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리베카 솔닛이 살아왔던 세상도 여성은 약자였다.
  여성뿐 아니라, 흑인, 성소수자,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를 내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분명 50년 전에 비하면 여성 인권에 대한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지금도 일어나는 범죄들을 보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본다. 여성이 동등한 목소리, 권리, 신뢰성, 기타 등등의 힘을 가진 사회라면 그런 폭력은 훨씬 드물게 나타날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지금도 계속해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 혐오에 대해 맞서고 목소리를 내며 싸우고 있다. 이 책을 쓴 것도 자신이 독립해서 살아왔던 과정 속에 일상에서 경험한 폭력의 참모습을 세상에 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 했던 이유다. 이 책은 그녀가 지금까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이다.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보지 못한 내가 그녀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기엔 스스로 너무 가부장적인 사회에 매여있다고 느꼈다. 젠더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이 사회 속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마치 사회 부적응자들이 쓰는 용어처럼 비치고 있다. 반면에 남성들도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 우리는 젠더 간 대치 상황을 이어가기보다는 혐오를 거두고 관심과 이해, 공감을 통하여 가부장적 사회의 타파,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관습과 싸워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관철되어 온 가부장적 관념에 대해 나는 과거 중학생 시절, 친구에게 일어난 폭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덤덤히 쳐다보기만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약자가 폭력을 당하는 것을 지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과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저항의 목소리를 낼 때라는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생각과 목소리가 작은 돌멩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언젠가 그 돌들이 모여 성을 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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