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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책

거미도 거미줄에 걸리며 살아간다 -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by 조각모음_KIDY 2022. 9. 1.

마중글
   거미도 자신이 만든 거미줄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끈끈이가 없는 방사선과 끈끈이가 있는 가로줄이 합쳐져 거미줄을 이룬다. 거미는 철저하게 방사선을 밟으며 살아간다. 거미가 방사선의 존재를 알고 있을 때 거미줄은 안전한 공간이다. 그러나 거미가 방사선의 존재를 모른 채 가로줄에 걸린다면 거미에게조차 거미줄은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없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서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류는 국가를 형성하고 사회라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이루기 시작했다. 집단을 이룬 인류는 생태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로 군림하게 되었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지니 인류는 내부에서 죽어가기 시작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내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책이다. 미세먼지가 천식을 유발하고 석면이 폐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우리가 관계 속에서 겪는 차별과 같은 사회적 폭력 역시 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 김승섭은 이러한 현상을 발견하는 학문이 사회역학이라고 말한다.

 

“사회역학은 그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입니다.”(p.14)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사회를 구성했지만, 가로줄에 걸려 움직이지 못한 채 사각지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소개한다. 성별에 대하여(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낙태금지법에 대하여(찬성과 반대), 해부학에 관하여(가난한 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노동자(부당 해고자, 소방공무원)와 하청업체(위험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세월호 참사(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등 사회라는 거미줄의 사각지대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희생되어 가는 이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희생자가 언제라도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느끼게 된다. 왜냐면 이제는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사회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꾸역꾸역 소속되어 살아갔지만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이 사회는 안전한 공동체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게 우리는 개인적이고 냉소적이게 됐다. 공동체를 위한 행동은 손해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시간 낭비고, 공동체를 위해 물질과 시간을 희생하는 사람들은 호구다. 슬프지만 우리는 우리가 만든 거미줄에 발이 걸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공동체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모여서 축구를 하는 그룹이 있는데, 성향, 나이, 직책, 환경이 다른 그룹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같은 종교인이라는 것이다. 오랜만에 진행된 모임은 노회장 직책을 가지고 있는 한 분의 질문으로 시작됐다. “젊은 사역자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해야 하는데, 반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우리와 함께 책을 읽고 있는 교회아저씨님을 딱 지목해서 물어보았다.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진행된 물음이기에 토론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각자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제3자의 입장이기에) 기억에 남는 입장을 나눠보고 싶다.

   첫 번째 입장.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은 소수자에서 소수자를 나누는 것과 같고,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다른 소수자들도 엮어서 차별하는 것과 같다. 소수자들을 환대하지 못하고 차별하기만 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역할을 잃으며 유지해나갈 동료들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이미 그러고 있다. 결국 교회는 해체될 것이고, 소수자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떠나갈 것이다.
   두 번째 입장. 교회는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계도의 역할을 해야 한다. 신앙적으로는 환영하지만,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복음의 본질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목회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복음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목회적 발언권이 점점 축소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장이 분리될 것이고 나아가 한국교회 또한 해체될 것이다.
   세 번째 입장. 이것은 정치적인 논리와 같다. 빨갱이, 반공과 같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결속을 이루어내는 지치는 정치적 장난이다. 그 대상이 이제는 성소수자가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뻔히 보이는 입장에서 그들에게 놀아나는 것은 지겹다.
   네 번째 입장. 별생각이 없는데 보수적인 그물망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던 이들에게는 괜한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들에게 그것을 설득할 자신도 없고, 설득하고 싶지도 않다. 시골에서 지치는 육체노동으로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방향을 강조해서 위로가 되는 것에 더 고민하고 싶다.

 

   왜곡이 있을 수 있으나 한 발 뒤에서 정리한 입장들이다. 흥미로운 대담이었다. 이렇듯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논의와 합의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회를 유지하고 싶은 걸까? 소수가 희생되는 다수의 사회인가, 소수가 존중받아 다수가 사라진 소수만의 사회인가. 다수와 소수는 왜 나누어지는가. 이 작은 축구 그룹에서도 저마다 생각이 다른데,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입장차이가 있을까. 책을 통해 그간의 경험을 곱씹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얕은 경험상 다수는 절대로 소수를 이해할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이기기 어렵다. 그래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각 소수자와 연대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 여럿이 있으면 숨통이 틜 것 같다. 책에서 소개한 IBM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소송을 도운 클랩 교수의 인터뷰는 이런 마음을 잘 풀어준다.

 

인터뷰어 : 왜 이런 일을 하나요? 돈 때문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클랩 교수 : 골리앗에 맞서는 것이지요. 법정에서 노동자들은 보통 이길 수 없습니다.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변호사
는, 어떤 학자는 그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거미도 거미줄에 걸리며 살아간다.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 같은 공간이 사회 곳곳에 피어났으면 한다. 책에서 진단한 아픔은 익숙한 아픔들이다. 엉성한 거미줄에 걸려서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인류는 오랜 시간 사회를 형성했지만, 아직도 거미줄 곳곳이 비어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분노했던 문장이 있다.

 

“너희들 고통을 증명하라고 말하는 사회”(p.182)

 

   엉성한 거미줄에서 살면 거미들도 엉성해지나 보다. 언제라도 자신과 연결된 소중한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모르나 보다.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노동자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차가운 시선에 말라가는 성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나 보다. 그래서 고통을 증명하고 보상받으면 됐다는 논리가 있는 것  같다.
   거미는 거미줄에서 살아간다. 방사선을 누린 채 자유롭게 살아가며 먹이를 잔뜩 먹는 배부른 거미들이 있는가 하면, 가로선에 발이 걸려 움직이지 못한 채 먹이가 되는 거미도 있다. 이상한 건 거미줄을 보수하기 위해 희생되는 거미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희생된 자리에는 누군가 다시 걸릴 수 있는 엉성한 거미줄로 보수가 된다. 그러나 안전하지 못한 집이라도 거미는 결국 살아간다. 거미줄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다. 거미도 거미줄에 걸리며 살아간다는 것을.

맺음글
   사회역학의 관점에서 책을 풀이해나가는 저자를 보며 신앙역학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사회라는 거미줄에서 도저히 치유될 수 없어서 종교를 찾는 사람들. 그러니까 사회역학으로도 발견하지 못한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발견하며 치유하는 것이 신앙역학이 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사회라는 거대한 거미줄에서 도태된 채 죽어갈 수 없어 신을 찾아 모인 사람들은 신앙 역학자가 될 것이다. 이들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것이다. 사회보다 더욱 거대한 신이 직접 거미가 되어 거미줄을 살아가셨던 것을 보았으니까. 거미줄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거기서 큰 위로를 받았으니까. 그렇기에 우리도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가지고 그들에게 찾아갈 것이다.

   축구 모임에서 말하지 않았던 나의 입장이 있다. “교회야, 더 해체돼라.” 사랑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한 교회들아 더 해체돼라. 믿을 수 없는 거대한 거미줄아, 더 찢어져라. 그리고 비어진 그 자리에 작지만, 더 다양하고 안전한 공동체들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작아진 만큼 사각지대는 더 좁아질 것이다. 다양한 만큼 찾아갈 공간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한 작은 거미줄들이 엮이고 엮이다 보면 하나의 커다란 거미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오늘 우리와 미래의 자녀들이 살아갈 안전한 사회적, 신앙적 공동체가 만들어지기를 꿈꿔본다.

러브라이프 / 사랑하며 살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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