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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책

호모 심비우스로서 ‘생태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위하여 - 『생태적 전환, 슬기로운 지구 생활을 위하여』를 읽고

by 조각모음_KIDY 2022. 7. 3.

  산업혁명 이후 100년 동안 지구 평균 기온이 1.09도 상승한 현재, 지구는 이상기후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8년 기상 관측 111년 만에 최악의 폭염이 일어났으며, 2020년 역대 가장 길었던 54일간의 장마가 있었다. 태풍의 횟수와 세기도 점점 잦아지고 강해지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인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가 내놓은 2021년 6차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추세대로 갈 경우 2040년 내로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를 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정도의 기온 상승을 안일하게 바라본다면 큰 오산이다. 점점 더 심해지는 기후현상의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생물다양성 감소, 전염병, 식량난, 전쟁, 기후난민 등이 발생하여 타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존 여부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일들은 다음 세대가 아닌 현세대, 우리 세대에 발생할 것이다. 만약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가 넘는다면 이전의 지구 상태로 되돌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티핑 포인트 1.5도를 넘지 않기 위하여 여러 협의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최재천 박사 또한 그러한 흐름 속에 전문가의 관점에서 현 상황과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환경 재앙의 역사를 개괄하고 현재 인류가 직면한 팬데믹, 기후위기, 생물다양성 고갈에 대한 문제를 전개해나간다. 나아가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서는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나는 이 책이 독자들로 하여금 기후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며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코로나 사태 이후 대중의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 인식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 이 책은 기존에 이미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한 담론을 되풀이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이제는 ‘왜 우리에게 생태적 전환이 필요한가’라는 논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렇다면 어떻게 생태적 전환으로 바꿀 것인가’라는 방안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와 함께 적극적인 실천이 동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구는 이미 점점 가라앉고 있는데 언제까지 탁상공론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한 ‘생태적 전환’과 ‘호모 심비우스’에 주목하며 어떻게 하면 생태적인 삶에 대한 거대한 대전환이 가능할 지 생각해 보자.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현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그는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을 통해 인지혁명이 일어났으며 농업혁명과 세계 종교의 등장, 과학혁명으로 인해 호모 사피엔스는 번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문명의 발전은 호모 사피엔스를 이 세상의 지배자로 우뚝 세웠다. 문제는 이러한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의 역사 속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계속해서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복자들의 멈출 수 없는 탐욕과 욕망은 사피엔스 간 경쟁과 폭력을 일으켰고 그 안에서 자연은 착취되고 희생되었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가 일으킨 여러 혁명은 기후위기라는 심각한 재앙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최재천 박사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이제는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단순한 종의 개량을 넘어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말한다. 호모 심비우스는 나와 타 생명 간에 공생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존재를 존중하고 환대하며 인간 중심에서 생명중심으로의 인지적 변혁을 겪은 인종이다. 이러한 호모 심비우스가 생태적 전환을 일으키는 진정한 생태문명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간 협의와 국내의 정치방향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굳건히 지켜온 문명과 패러다임을 고수한 채 작금에 기후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경제성장과 기후위기라는 두 가지의 과제 중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상태는 유지하지만 우리가 누림으로 발생하는 탄소를 흡수할 수 있는 과학기술 발전과 정치제도 등을 통해 탄소제로를 만들겠다는 관점이다. 나는 탄소포집기술, 탄소배출권도 이러한 관점 아래 제안된 방안이라 생각된다. 물론 이같은 해결방안도 필요한 담론이긴 하지만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이제는 저자의 말처럼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호모 심비우스 종으로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고후 5:17)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개념을 새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죄의 순기능은 잘못된 인식에 대한 성찰과 회개를 동반하며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66대 교황인 성 프란체스코의 선언은 의미가 있다. 그는 2019년 ‘하느님, 다른 사람들, 공동체, 그리고 환경에 반하는 행동 또는 태만’을 ‘생태적 죄’로 규정하고, 이를 천주교 교리에 포함한다고 선언했다. 교회와 성도가 실질적으로 현재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죄로 인식하고 회개하며 성화의 과정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교리로서 명시화한 것이다. 지금의 기후위기의 문제 원인을 개인과 사회의 죄로 인식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생태적 전환의 시작이 가능하다. 그래야 기후위기를 시혜적이고 보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환대와 공생의 관점으로의 풀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논의와 실천이 전개될 것이다.

 

  또한 호모 심비우스, 공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생태여성주의 신학자 샐리 맥페이그는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이해하는데 이 모델이 요구하는 인간관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본래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타자들에 완전히 의존된 채 살아가는 상호관계적이며 상호의존적 존재이며, 동시에 그 몸의 작은 부분인 지구혹성의 행복에 대해 우리가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라는 인간관이다.
샐리 맥페이그, 기후 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김준우 옮김,(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8), 117

 

   이러한 생태적인 인간관은 우리가 만물의 중심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 밑에 있는 것들”(생물과 무생물의 모든 에너지 원천)에 의존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인간관은 최재천이 말하는 공생인으로서 살아가는 호모 심비우스의 인간관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우리는 4~5만년간 호모 사피엔스로서 살아온 역사가 있기에 지금까지 추구했던 가치를 쉽게 내려놓기 어렵다. 책 14쪽(대부분의 사치품들과 우리 삶을 안락하게 해 준다는 것들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며 인류의 승격에 명백한 방해물일 뿐이다)에서 말하는 간단한 명제마저도 우리는 얼마만큼 지킬 수 있을까. 만족과 감사를 모르며 끊임없이 확장 요구되는 소유와 안락한 삶의 추구를 우리는 정말 버릴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세상을 부정하고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희망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 싶다. 신앙인으로서 불안을 벗어나 희망을 품고 생태적인 삶을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대한 무한한 신뢰가 거듭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일으키며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신 분이셨다. 절망과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일어날 것이라 여긴다면 우리는 인류의 생의 끝자락에서도 초연하게 호모 심비우스로서의 삶을 일구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이 말은 셀리 맥페이그의 견해이기도 하며 생태적인 삶을 살아가려 나름 애써온 나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모 철학자의 말처럼 이 책을 읽은 우리 모두가 불안과 좌절에서 벗어나 희망을 노래하며 생태적 삶의 전환이라는 큰 결단을 내는 호모 심비우스로서의 삶을 살길 바란다.

 

30대 / 궁금하지도 않겠지만 그닥 밝히고 싶지도 않다. 세상 속에서 나름 n/1 몫을 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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