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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먹는 말씀이 맛있다?

골라먹는 말씀이 맛있다? - 낙태죄

by 조각모음_KIDY 2020. 12. 9.

 

 

현재 낙태죄 폐지는 뜨거운 감자다. 드디어 정부가 개정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처벌조항 헌법 불합치 판결하였다. 이에 대한 형법 및 모자보건법 개선 입법 시한을 2020년 12월 31일까지로 하였고, 이때까지 개선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 처벌조항의 효력은 상실된다. 개정안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임신 14주 이전 사유나 상담 등 절차·요건없이 임신한 여성의 의사로 낙태가 가능하다.

*임신 14-24주 사이는 사회경제적 사유(강간에 의한 임신, 임산부의 건강 위험)이 있으면

낙태가 가능하다. 단 24시간의 숙려기간과 모자보건법이 정한 상담을 받아야 한다.

*임신 24주 이후 낙태 시 형사처분이 가능하다.

*낙태 시 ‘배우자 동의 요건’은 삭제.

 

개정안이 발표되자 보수 기독교계는 서명운동을 독려하며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다.” 그들에게 낙태죄 개정안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낙태죄 개정안이 태아를 내 맘대로 잘라내 버릴 수 있는 손톱, 임의로 떼어내 버릴 수 있는 종양처럼 취급하며 종국에는 사회적으로 낙태율이 더 높아지게 할 것이라고 한다. 덧붙여서 14주 이전 태아를 임신한 여성의 결정으로 낙태가 가능한 점이 문제며, 낙태죄로 인해 고통받아온 여성들의 피해 사례를 ‘극히 일부 사례’라며 비하한다. 더 나아가 낙태 예외조항인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에 따른 임신이라고 할지라도 태아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태아 역시 보호받아야 할 희생자라고 주장한다.

 

위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근거는 아래의 성서 구절이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기에 태아를 죽이는 낙태는 ‘살인행위’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시편 139:13)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71:6)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15)

 

사실 위의 구절을 낙태죄 폐지 반대 근거로 삼는 것에 대해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다. 너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태죄 반대 성명서가 줄줄이 나오고, 천주교에서는 100만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도 낙태죄를 반대한다는 청원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다. 그래서 성서적 근거를 들먹이며 낙태죄 반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성서를 편협하게 바라보고 있는지 밝히고자 한다.

 

일단 위 성서구절을 낙태죄 폐지의 반대 근거로 사용한다면 모순점이 발생한다. 아래의 구절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시편 22:31)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욥기 3:10)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렘 20:17)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마26:24)

 

 

이미지 출처 : 한겨레 『김수정의 여성을 위한 변론』에서 일러스트 조재석

 

단순히 성서 구절을 나열해도 저들이 얼마나 편협한 시각으로 성서를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다. 모태에서 죽기 원했던 예레미야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유다에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 기록된 성서 구절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위의 성서 구절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성서의 배경과 맥락을 무시한 채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성서를 제멋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재밌게도, 성서를 제멋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벧후1:20)

 

그런데도, 보수 신학자들은 “성서는 자궁 속 태아에 인칭대명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태아가 영혼을 가진 인격체이다.”라고 말한다. 성서의 배경과 맥락을 무시한 채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제멋대로 해석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바르게 볼 수 있을까?

 

성서를 바로 보고, 성서에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한다. 낙태죄 관련 이슈에서 성서를 근거로 이루어진 질문들은 잘못되었다. 보수 기독교 진영의 주장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 중, 무엇이 더 우위인지를 묻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지금 그리고 여기’와 성서 속의 ‘지금 그리고 여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낙태죄로 인해 지금 여기서 고통받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고통받는 자들을 타자화 시키지는 않았는가?’, ‘낙태죄 이슈 안에서 하나님은 어디를 바라보고 계시는가?’

 

따라서 우리는 ‘낙태죄’ 이슈로 억압받는 여성들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임신에 대한 책임, 낙태에 대한 책임, 육아에 대한 책임을 일방적으로 짊어져야 했던 여성의 삶을 생각해보자. 임신은 혼자 할 수 없는데, 임신과 관련된 모든 책임은 여성들이 짊어져야 했다. 더 나아가 여성은 출산을 위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갈 권리를 사회적으로 박탈한 것이다.

 

 

 

 

21세기에도 “성범죄 혹은 근친상간으로 임신을 해도 태아는 죄가 없다.”라며 낙태죄 존속을 말한다. 임신으로 인한 경력단절을 우려해 임신을 꺼리는 직장인 여성들에게 존재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눈총을 보낸다. 낳아도 키울 수 없는 생활여건 때문에 태아를 포기해야 하는 미혼모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냐며 비난한다. 이 모든 상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2차 가해, 3차 가해가 발생한다. 낙태를 죄로 규정한다면 죄인이 과연 임산부일까?

 

낙태죄 폐지는 그동안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해방케 하는 작은 발걸음이다. 예수님은 자기 삶의 방향을 이사야 61장 1절 이하의 구절을 통해 밝히셨다. 예수님의 취임 설교라고 불리는 누가복음 4:18-19을 보면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사야 61장 1절 이하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셨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포로된 사람, 눈먼 사람을 찾으시고 만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금 여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셨다.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시선으로 낙태죄 이슈를 바라보자. 어떻게 보이는가? 적어도 필자에게 낙태죄 폐지는 21세기에도 억눌린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지금 그리고 여기’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는 사건이다. 아울러 여성을 억압하고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어온 가부장적 사회의 죄를 고발하며 함께 회개할 기회이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한다.

 

낙태죄 전면 폐지되도록!!

 

 

교회아저씨 / 생태적 전환을 위해 육식소비를 1/10로 줄인 육식주의자. 내가 살기 위해 생태적 전환을 외치는 사람. 그린워싱을 담배만큼 싫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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