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각 교단 총회가 열릴 때면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며 많은 숫자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 중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십일조’와 관련된 통계다. 십일조 액수가 줄었으며, 십일조를 온전히 하는 성도의 비율이 줄었다는 이야기는 대학 입학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듣고 있다. 이젠 그러려니 할 정도로 무뎌졌다.
가장 큰 문제는 각 교단 총회에서 매년 똑같은 내용이 되풀이 된다는 사실과 성서가 십일조를 통해 제시하는 하나님의 뜻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십일조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여기서 ‘원론적’이라는 의미는 ‘십일조는 구약의 관습으로 이미 시대적 적법성을 잃었는가?’ 혹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신앙적 원리로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가?’ 에 대한 대답이다.
앞서 아브람과 멜기세덱 사이의 이야기가 십일조 당위성의 근거로 사용되는 것은 왜곡된 성서해석임을 지적하였다. 아브람과 멜기세덱 이야기에서 성서는 십일조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아브람과 멜기세덱 이야기를 통해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교회의 관심이 성서의 목소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례다. 이쯤에서 질문이 생긴다.
‘십일조에 주목하는 성서 본문은 존재하는가?’
십일조에 관심을 쏟는 본문은 레위기에서 처음 만날 수 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십일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제사장과 하나님의 관계를 집대성한 레위기는 십일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십일조가 제사장 그룹의 밥줄이었기 때문이다. 민수기 18:21을 보면 레위 자손에게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기업으로 주어 회막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18:26 이하에 십일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십일조는 레위 자손들이 생활하기 위한 유일한 수입원이었고, 제사장 그룹은 이를 강화해야만 자신들의 종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레위기 27:30 이하를 보면 십일조를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땅의 십 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 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에게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레27:30)
구약에서 ‘거룩하다’(카도쉬)는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는데, 십일조 규례에서 사용된 ‘거룩하다’는 강제성을 확보하기 위한 위력적 언어로 보인다. 더군다나 레위기 17장-26장이 성결법을 다룬 본문이어서 더 위력적으로 보인다.
32절에 보면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짐승을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방법까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경우를 금지하고 있으며(33절), 십일조를 무르려 하면 그 값에 1/5을 얹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마도 십일조 법에 따라 해마다 양 떼나 소 떼를 바쳐야 하는 처지에서 십일조는 굉장히 비쌌을 것이다. 그런데도 레위기에 언급된 십일조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의 원리로서 꼭 지켜야 하는 규례로 소개된다.
반면, 십일조의 역할은 소개하지 않는다. 역할을 소개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측해 보면 십일조를 법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 역할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에 신명기에 나타난 십일조 본문은 흥미롭다. 십일조의 의무에 대한 설명보다 십일조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에서 십일조를 언급한 부분은 14장이다. 신명기 14장을 요약하자면 ‘일상 속에서 지켜야 할 성결법’이라 할 수 있다. 신명기도 레위기와 마찬가지로 십일조를 성결법 테두리로 보았다. 신명기는 십일조의 기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신14:23d)
먼저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신명기 기자는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를 하나의 잔치로 표현하고 있다. 23-26절에 보면 가지고 온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가족과 나누어 먹으라고 한다. 매년 십일조를 드리는 날 잔치를 열어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가족 단위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혹시 너무 멀어서 오지 못하는 경우 소출을 돈으로 바꿔서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이동하여 가족들과 먹고 마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3년마다 십일조를 다 모아서 저장했다가 성안에 유산 없이 사는 레위 사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부르게 먹게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한 잔치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이웃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하고 계신다.
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십일조 본문은 신명기의 약자 보호법의 서두이기도 하다. 십일조 본문을 시작으로 신명기에는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장기적인 조치에 대해서 말한다.
A 매년 그리고 3년마다 십일조 14:22-29
B 매 7년마다 빚의 탕감 15:1-6
C 가난한 자에게 돈을 내어 주라는 권면 15: 7-11
B 매 7년에 계약된 종의 해방 15:12-18
A 초태생 희생제사 15:19-23
문학적 구조를 보아도 가난한 자를 살리기 위한 법임을 알 수 있다.
사회에서 ‘법’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준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성서에 나타난 십일조는 법으로서 당시 사회구성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주었다. 예수님은 이를 레위기(레19:18)와 신명기(신6:5)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마 22:37-39)
원론적으로 십일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위한 예배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며, 동시에 사회적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성서가 이야기하는 십일조의 의미를 생각하면 앞서 가졌던 원론적 질문은 무의미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일조의 필요 유무를 따지는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위한 공동체적 움직임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동시에 사회적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완비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십일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말3:8)
교회아저씨 / 탈(脫)교회를 꿈꾸는 전도사. 제 1성서 공부를 좋아하는 신학생. 요즘 넷플릭스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인.
'골라먹는 말씀이 맛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라먹는 말씀이 맛있다? - 낙태죄 (0) | 2020.12.09 |
---|---|
골라먹는 말씀이 맛있다? - 차별금지법(2) (0) | 2020.11.03 |
골라먹는 말씀이 맛있다? - 차별금지법(1) (0) | 2020.10.15 |
골라먹는 말씀이 맛있다? - 십일조(1) (0) | 2020.06.09 |
골라먹는 말씀이 맛있다? - 주일성수 (0) | 2020.05.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