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원. 혹시 2500원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는가? 2500원은 택배업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숫자다. 2500원은 가장 싼 가격으로 택배를 보낼 수 있는 최저 금액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가장 급격하게 바뀐 것 중 하나는 바로 배달업 혹은 택배업이다. 그래서일까? 택배업의 가장 대표적인 기업인 CJ 대한통운은 2020년 2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고 언론이 전하고 있다. 시장 점유율 50%를 넘기면서 업계 1위에 올랐다. 2020년 3분기는 추석 명절 물량과 함께 코로나19 특수가 겹쳐져 더욱 성장을 하게 된 상황이다. 게다가 네이버와의 자본 동맹이 알려지면서 기존의 사업망을 더욱 확대시킬 미래를 그리고 있다.
이런 공격적인 사업 확장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류 시스템, 특히 곤지암HUB와 같은 메가허브 터미널의 등장으로 더욱 수월하게 이뤄졌다. 곤지암HUB는 지난 2018년 완공됐다. 규모는 유피에스(UPS)의 ‘월드포트(Worldport)’, 페덱스(FedEx)의 ‘슈퍼허브(Super Hub)’에 이은 세계 3위, 아시아 최대 규모의 메가허브 터미널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허브를 구축하는 것이 필자에게 차곡 차곡 자신의 물건들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농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누가복음 12장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시는 농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부자의 땅에서 농작물이 풍족하게 생산되었다. 농부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작물을 보관할 곳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내 헛간을 허물고 더 큰 것을 쌓을 것이며, 거기에 내 곡식과 내 물건을 모두 저장할 것이다. 그리고 영혼아, 영혼아, 너는 여러 해 동안 놓여진 넉넉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겁게 지내라.” 그 순간 하나님께서 등장하신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야, 바로 이 밤에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라며 비유는 끝이 난다.
비유 속 농부를 다시 들여다 보자. 농부는 땅을 통해 엄청난 풍요로움을 만끽한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풍요로움이 그저 농부 한 사람의 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비유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농부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놓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땅으로부터 풍성한 소출을 얻기 위해서는 밭을 심고, 농작물을 경작해야 하고, 수확하기 위해서는 수개월의 노동력과 수십 명의 노동자가 필요하다.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대부분 배고픔이 일상적 위협으로 다가왔던 농민, 일용 노동자, 농장의 일꾼들이었다. 오직 그들만이 예수께서 이야기하는 비유의 이면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놓친 것은 바로 이 농장의 일꾼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부유한 농부가 바라보는 현실에서 실종된 사람들이고, 이들의 존재가 비유에서 마치 유령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사실 노동자들이 수확한 곡물과 재산들을 보관할 헛간을 짓고 확장하는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다. 헛간은 가뭄, 기근, 또는 농작물 실패를 대비하기 위한 필수품이다. 문제는 헛간이라는 것이 한 사람, 한 집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헛간은 지역 사회의 중요한 안전망 역할을 감당한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자 유산이다. 땅에서 나온 풍요로움은 선택받은 소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미망인, 고아,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을 위해, 더 나은, 더 충실한 하나님의 선물들을 관리해 줄 것을 요구했다. 비유의 상황은 기존 유대의 전통과 대조되는 상황으로부터 발생한다.
예수께서 탐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사용한 단어는 플레오넥시아(pleonexia)다. 이는 더 크게 성장하고, 풍요를 극대화하고, 증가를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자의 권리를 빼앗고 희생시킬 수 있는, 더 나아가 폭력까지도 행사할 수 있는 마음이다. 농부는 분명 ‘자신’을 위해 이 헛간을 짓고 있다. 부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보호하며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공동체를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부는 축복이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저주가 될 것이다.
플레오넥시아는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유효한 단어다. 2020년 10월 8일 택배 업무를 하다 도중에 숨진 택배기사 김원종 씨의 사건을 아는가? 그는 하루평균 16시간씩 일을 했다. 사고 당일 병원의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간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해 받은 전화의 내용은 ‘왜 택배가 오지 않느냐’라는 고객들의 문의였다. 축구장의 40배에 달하는 메가허브 터미널의 헛간에는 오늘도 수많은 물질로 가득하다. 그 욕망들이 차곡 차곡 쌓이며 얻어지는 모든 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최저 택배비용 2500원도 포함되어 있다.
2500원이라는 금액은 기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고 백마진이나 리베이트로 흘러가 증발하는 금액이다. 2500원은 물건을 전달해주는 이에게 문의를 하고, 택배가 언제 오냐고 독촉할 수 있는 자격의 금액이다. 2500원은 내가 누리는 유익과 편리함이 누군가의 희생과 절박함으로 빚어진 것을 다시 일깨워주는 금액이다. 그리고 2500원은 한 아버지의 아들의 목숨을 가져간 금액이다. 김원종씨의 죽음은 그냥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다. 노동자의 죽음은 공동체의 죽음이다. 공동체의 죽음은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죽음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죽었다는 것, 하나님의 창조물이 죽은 것 아닌가?
하나님이 빚어낸 인간을 그저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이나 노동의 값어치만 주어지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것은 2500원 뒤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탐욕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는 순간,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망각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탐욕의 우상숭배를 절연히 끊어내고,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숫자만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부유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부유한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길
키디 / 책 모으는 걸 좋아하는 사람. 신학을 전공했고 현재 교회 전도사다. 자신만의 공간에 단상을 남기고 감상을 나누며, 스스로의 이상을 향해 한 걸음씩 옮기고 있다. 선교하는 수도 공동체 『더불어 홀로』에 몸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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