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키디의 끄적끄적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by 조각모음_KIDY 2020. 7. 23.

  누가복음 7장의 말씀이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를 초청한다. 식사를 하던 중, 한 여인이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찾아온다. 그녀는 예수의 발로 다가가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신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릅니다. 이 행위를 본 바리새인과 주변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여인이 죄인이라는 이유로. 그 모습을 본 예수는 그들에게 두 명의 탕감받는 자들에 대한 비유를 이야기한다. 이 비유를 말씀 하시고 예수는 여인을 향해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환대받지 못한다.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그의 죄를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수많은 남성 주석가들은 여인이 저지른 죄의 본질을 다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할 때,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여인의 죄만큼 파고들지 않았다.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시선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 시선과 기준을 만들고 조장하는 것은 누구의 작품일까?

 

  유대 당시 의 기준은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의 기준에 근거해 있다. 예수를 식사의 자리로 초청한 이는 시몬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이다.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이들과 자신을 분리해 스스로 거룩하고 정결한 자라 칭하며살아갔다. 그렇게 스스로 정결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이들에 의해 죄인이라는 '사회적/종교적 낙인'이 찍힌 사람 중 하나가 오늘 말씀에 등장한 여인이다.

 

  시몬은 예수의 말을 반박한다. 이 여자가 누구냐고, 이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고. 그를 포함하여 초청된 사람들은 그녀를 주거침입자이자 죄인으로 여기지만, 예수의 눈에는 그녀가 식탁에 앉아 있어야 한다. 누가복음 7:34에서 예수는 자신을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했다. 이런 행동과 발언은 유대 공동체와 바리새인들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예수의 시선과 행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과 여인의 이야기를 함께 식탁에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41~43절의 비유를 통해 시몬과 초청받은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게 이야기 속으로 인도한다. 이내 시몬은 판단을 내리고 예수는 그의 결론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예수는 끝나지 않았다. 예수는 시몬에게 여인을 통해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인을 바라본다.

 

"이 여자가 보이느냐"

 

  시몬의 눈에는 과연 무엇이 보였을까? 시몬의 눈에는 머리칼로 예수의 발을 닦는 모습이 보였을까? 시몬의 눈에는 여인이 쏟아내는 감격의 눈물이 보였을까? 이전과 같이 그저 죄인이라 불리는 여인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 누군가로부터 환대를 받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 환영과 환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나라와 시대를 떠나 사람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발생했던 문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그 문제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화냥년’, ‘위안부’, ‘양공주라 지칭된 이들이다.

 

  화냥년이란 단어를 들어봤는가? 돌아올 환()자에 고향 향(). 환향(還鄕)에 여성을 비하하는 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단어이다. 설에 의하면 북쪽 국경에서 많은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여성들을 일컬어 말한 단어다. 이들은 살아 돌아왔음에도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과 환대받지 못했다.

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몰린 여인들. 북쪽의 오랑캐들은 승리의 대가로 젊고 고운 여인들을 전리품으로 취해 자신의 땅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여인들은 사로잡혀 온갖 능욕을 당하고 저항한다. 그렇게 탈출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자신들을 반겨줄 고향은 사라지고 만다. 그들을 반기고 있는 나라는 정절을 지키는 여성들만이, 몸을 깨끗이 한 여인만이 머무를 수 있는 나라였다.

 

 

 위안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는 물론이고 가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폭력 앞에 내몰린 위안부들은 몸을 강탈당하고, 몸의 식민화를 몸속 깊숙이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전유물로 전락한 삶.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삶으로 전락한 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치유해줘야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는 쓰레기 같은 학자로 인해 이들의 명예는 더욱 훼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해방 이후, 미군을 상대로 성 노동을 종사하던 여성들인 양공주들이 있다. ‘헬로걸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던 이 집단은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비하 되었다. 전쟁 후 생계유지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던 여성 중 많은 수가 인신매매와 직업소개, 사기 등으로 인해 기지촌으로 끌려와 성매매의 피해자가 되었다. 대부분 강제성이 짙었기에 원칙적으로는 스스로 찾아온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남성으로서, 국가로서, 민족으로서 수치를 당한 대표적인 경험이자, 가부장의 위기라는 이유로 이들의 이야기는 배제되고 소외되어 왔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중이다.

 

  필자는 최근 회복적 서클훈련과정을 이수했다. 이 훈련과정을 통해 배운 것은 손상을 당하고 상처를 입히고 갈등을 조장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결과를 다룰 때, 사법적인 해결방식이 아니라, 당사자의 치유와 관계의 개선 그리고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방식을 채택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안전과 복지를 돌볼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가해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입장을 중요히 여기는 것이다.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개인과 공동체가 애써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회복적 서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함께 동반되는 경청이다. 경청은 타인의 입장을 내 안에서 곱씹어볼 수 있는 과정이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남을 대할 줄 아는 능력. 힘든 상황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가 열린 마음으로 그것이 자기 일처럼 여기며 공감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이 과정을 통해 소외당하고 외면받은 이는 회복이 된다.

 

  예수는 언제나 올바른 곳을 보며 회복을 위해 그들을 묵묵히 바라본다. 상대방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가까이 하고,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아픔을 받아주는 자세. 그리고 아픔을 위로해주는 한 마디를 건네 주시는 분. 그것이 예수의 모습 아니던가? 머리털로 발을 씻기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예수는 여인을 향해 무언가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분명 자신의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기준을 들이대며 죄인이라 소리칠 것인가?

예수처럼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며 경청하고 위로할 것인가?

 

당신의 발을 닦고 있는 이를 향해

당신은 어떤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가?

 

 

  

 

 

키디 / 선교하는 수도 공동체 『더불어 홀로』에 몸담고 있다. 책 모으는 걸 좋아하는 사람. 신학을 전공했고 현재 교회 전도사다. 자신만의 공간에 단상을 남기고 감상을 나누며, 스스로의 이상을 향해 한 걸음씩 옮기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