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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가 보이는 사람들《보건교사 안은영》

by 조각모음_KIDY 2020. 10. 14.

  넷플릭스의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 연일 화제를 모아 이제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하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젤리가 보이는 보건교사 안은영, 그러나 비단 안은영만 젤리를 목격하며 지내고 있는 걸까?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기 전 스스로에게 스포일러가 안 될 정도로만 간단한 리뷰들을 몇 개를 보고 작품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들을 추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의 맥락이 연결되는 게 지저분하다며 저평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페미 작품이 아니냐며 믿고 거른다는 반응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믿고 걸렀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불가사의한 젤리가 눈에 보이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이 드라마의 주연이다. 물론 작품에서 이 젤리를 볼 수 있는 게 안은영만 그런 건 아니다. 매켄지라는 영어교사, 그리고 젤리가 보이는 사람들이 만든 안전한 행복이라는 조직도 있다.

 

  젤리는 드라마에서 인간의 욕망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다고 설명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젤리는 인간의 욕망이 남기고 간 어떤 여파를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안은영은 알록달록한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그 젤리들을 격파하며 살아간다. 캡틴 아메리카니 아이언맨이니 다양한 히어로들이 도시를 부수면서 빌런과 싸우는 건 많이 봤지만, 안은영처럼 주변에 절대적으로 무해한 히어로는 처음 봤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가장 현실적인 판타지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무력한가. 인간의 욕망 그 자체에는 대항할 수도 없고, 고작 욕망이 남기고 간 젤리들이 나 자신, 내 친구들, 혹은 내 학생들을 해하지 못하게끔 장난감 칼로, 비비탄 총으로 제거하려는 안은영의 모습이. 그리고 그 모습은 또 얼마나 우습고 고독한가. 마치 홍인표에게 젤리제거 모습을 들켰을 때처럼.

 

  그러나 그 무력함과 우스움 때문에 사람들은 안은영에게 이끌린다.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히어로로 살고자하는 한 보건교사의 삶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때로는 학생들을 전부 다 실성시킬 정도로 강력한 젤리와 싸우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안은영이 그 거대함과 어떻게 싸워나갈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볼 뿐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런 내용이다.

 

  안은영의 삶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들도 수많은 젤리를 보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떤 욕망의 여파를 목격해오며 살아왔나? 학생시절 경쟁을 부추기는 입시부터 시작해서 여러 친구들의 자살을 목격했을 수도 있고, 취업부터 시작한 다양한 청년들의 고난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차별과 난민문제를 비롯한 유색인종차별, 장애인을 배제한 사회, 그리고 개개인이 보아왔을 너무나 다양한 젤리들이 우리들을 익사시킬 만큼 존재하지 않는가.

 

  어쩌면 현명하게 산다는 건 그 욕망의 여파들을 역이용하면서 대세에 편승하고 돈도 벌고 편하게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켄지처럼 젤리들을 캡처해서 필요한 학생들에게 팔아치우면 얼마나 편한 삶이 보장되겠는가? 내 욕망의 여파 때문에 누군가가 조금 안 좋은 일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대부분은 그 수많은 젤리들을 못 본 척하게 된다. 세상이 어떻고 이런 문제는 젊었을 적 혈기왕성할 때나 하던 고민으로 치부되기 시작한다. 젤리가 안 보일 때는 세상이 그렇게나 완벽하게 보였다고 말하는 안은영처럼. 그러나 내 눈꺼풀 위에 얹힌 돌 하나 걷어내면 젤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너무나 자명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서 안은영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혼자 고독하게 싸우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가는 삶을 자처한 것이니까. 세상은 현명하게 살아가라고 말하지만, 안은영은 미련하게 살아가고자 하니까.

 

  어떤 이야기의 주제가 미련하게 살자면 조금 이상한 것일까? 나는 그럼에도 그 이상함에 감동을 받았다. 그깟 무지개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젤리들을 캔디 크러쉬 사가처럼 만드는 그 나약함에 위로받았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미련하게 살아도 된다는 용기를 우리에게 쥐어준다.

 

  가능하다면 욕망의 여파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말고 살아가보자. 가능하다면 현명하기보다 미련하게 살아가보자. 각자 자신만의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서 저항해보자. 분명 실망과 좌절이 가득할 것이지만, 어쩌면 우리들의 삶에서 혜민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야매번역가 / 20. 신학대학원까지 졸업했으나 교회는 일 년째 쉬는 중. 스팀 게임, 넷플릭스, 추리소설, 드림팝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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